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우제츠 절멸수용소 (문단 편집) == 운영 역사 == 나치 치하의 유대인들은 바르바로사 작전 전까지 그 운명이 정해지지 않았다. 1933년 나치 집권 직후부터 나치 독일 치하의 유대인들은 탄압받아 왔지만 일부가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진 것을 제외하곤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경우는 적었다. 나치는 반 유대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실현할 방법을 두고 고민했는데, 처음 나치는 점령지 내의 유대인들을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따로 격리시키거나[* 베우제츠 근처의 대도시 루블린서는 윗 문단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근교지역에 추방된 유대인들을 격리시켜 살게 하는 '니스코 보호구역(Nisko 'reservation')'을 만드는 중이었는데, 나치는 여기서 약 95,000명의 유대인을 살게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바르바로사 작전과 함께 폐기되었고 건설작업도 중지되었다.] 마다가스카르 같은 오지에 대규모로 추방시키는 안을 선택하려 했다. 하지만 여러 행정적인 이유로 실행이 어렵게 되자 바르바로사 작전 직후부터 나치는 유대인을 절멸시키기로 가닥을 모았고 폴란드 이동의 지역에 아인자츠그루펜을 풀어 유대인 대량 학살을 지시했다. 그리고 기존 점령지에서도 학살이 계획되었다. 유대인을 직접 처형하던 아인자츠그루펜의 대원들이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고통받자 기존 지역에서의 학살 방식은 가스처형을 주된 방식으로 한 산업화된 학살이 되었다. 먼저 직할령이었던 바르테란트 제국 대관구의 유대인 절멸을 목적으로 1941년 10월부터 헤움노 절멸수용소를 세우기 시작했고 10월 말엔 하인리히 힘러가 루블린의 총독부 SS 경찰 사령관 [[오딜로 글로보츠닉]]에게 절멸수용소 건설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루블린은 총독부 내의 약 200만에 달하는 유대인을 절멸하는 '라인하르트 작전'을 개시하고[* 대상이 총독부 내의 유대인 만은 아니었고. 총독부 경계 바로 밖의 비아위스토크 같은 대도시도 포함되었다. 그런 한편 총독부 내의 유대인이 직할령에 있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가기도 하는 등 절멸 구역이 칼같이 구분된 건 아니었다.] 절멸수용소를 지을 자리를 물색했다. [[파일:Holocaust Poland.png|width=600]] ↑ 폴란드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 확대 가능. 베우제츠 위치를 확인 바란다. 총독부는 지도에 총독부라 표시된 지역[* 바르바로사 작전 이전 총독부 영역]과 커즌 선(붉은 선) 너머 갈리치엔 구역을 합친 영역이다.[*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총독부 영역에 추가됨] 하얀 두개골은 대규모 총살이 일어난 곳 중 몇 곳을 표시한 것이다. 베우제츠는 폴란드의 두 주요도시인 루블린과 르부프 중간에 있었다. 이 두 도시 주변은 폴란드 남부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이 거주하던 지역이었고 베우제츠 마을엔 두 도시를 잇는 철도가 지나고 있었다. 따라서 나치에게 있어 베우제츠는 절멸수용소를 짓기 최적의 장소 중 하나였고 루블린 라인하르트 작전 사령부는 철도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에 절멸수용소를 짓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베우제츠 절멸수용소는 1941년 11월 1일 착공되어 1942년 2월 말 세워졌다. SS 내에서도 사악하기로 악명높던 크리스티안 비르트가 12월부터 건설 지휘를 이어받았는데, 수용소 건설이 완료된 뒤 수용소장이 되어 8월까지 재직했다. 한편, 1940년 초 베우제츠엔 이미 노동수용소가 세워졌었는데, 이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유대인 뿐 아니라 근처의 폴란드인도 있었다. 이들은 소련과의 국경에 '오토' 라인'이라는 요새 건축에 투입되었고 1940년 10월 해산되었다. 이 수용소는 후에 지어질 절멸수용소와는 어떤 연관점도 없다. 가스학살의 아이디어는 이미 T-4계획때부터 시험적으로 제시되었는데, 가스 처형은 헤움노 절멸수용소가 지어질 당시 절멸수용소로서는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하지만 헤움노에서는 가스실을 짓지 않고 가스 밴만 이용했기 때문에 '''학살 효율'''이 좋지 않았다. 베우제츠 건설 담당자이던 크리스티안 비르트는 헤움노의 사례를 '''개선'''하여 절멸수용소 처음으로 가스실을 지었고 이 가스실을 샤워실로 위장하는 아이디어 역시 비르트에게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헤움노는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하나의 완결된 절멸수용소라 하긴 어려웠고 기존의 시설물 여럿을 절멸수용소로 '구성'한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베우제츠는 처음으로 희생자 하차, 학살, 시체 처리가 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완결된 절멸수용소로서 이후에 지어지는 절멸수용소의 표본이 되었다. 처음 지은 가스실은 나무 판자로 이루어진 오두막 같은 건물로 3개의 작은 가스실이 있었다. 학살속도는 가스 밴만 이용하던 헤움노보단 확실히 빨라서 3개월동안 8만명을 학살했지만 밀려드는 유대인을 모두 학살하기엔 여전히 너무 작았고 1942년 6월 구 가스실을 허물고 6개의 가스실을 가진 콘크리트로 된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하루 최대 15,000명을 학살하던 베우제츠는 1942년 말까지 맡은 구역의 유대인들을 거의 모두 살해했고, 12월 11일을 마지막으로 베우제츠에서의 학살은 끝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